2022년 9월 17일 토요일

[펌] 스물 다섯의 겨울에 서른 셋의 나를 만난 다는 건.

 버스 창가 쪽에 앉은 나는 창 밖과 시계를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꽉 막힌 도로와 거북이처럼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차들을 

보고 있자니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시계를 바라봤다. 

이대로 가면 약속 시간에 늦을게 분명했다. 오늘은 여자친구와의 100일 기념일이었다. 

모든 계획은 완벽했다. 평범한 대학생들은 엄두도 못낼 고급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선물로 값비싼 명품 가방까지 준비했다. 하지만 갑자기 내린 폭설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올 해는 내 인생에 있어 최고의 한 해 였다. 작년까지만 해도 난 그저 평범한 대학생일 뿐이었다. 

남들처럼 등록금을 벌고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수업이 끝나면 아르바이트를 하고 

점심값을 아끼기 위해 혼자 학생식당 구석에 앉아서 제일 싼 밥을 먹었다. 

 

하지만 올해부터 갑자기 운이 트이기 시작했다. 나보다 성적이 좋던 친구들이 줄줄이 휴학을 

해 뜻하지 않게 장학금을 받게 됐다. 내 행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장난삼아 샀던 복권이 당첨된 것이다. 비록 1등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 돈이면 적어도 

1~2년 정도는 온갖 사치를 부리며 살아도 충분히 차고 남을 액수였다. 

가장 큰 행운은 여자친구를 만난 일이었다. 

늘씬한 키에 육감적인 몸매, 길을 걸으면 누구나 뒤돌아보게 만드는 미모까지. 

작년의 나였다면 감히 쳐다보지도 못 할 여자였다.

나는 온갖 선물 공세로 마침내 그녀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돈이 아깝긴 했지만 아직 잔고는 충분했다. 그리고 팔짱을 끼고 길을 걸으면 느껴지는 남자들의 

질투와 부러움이 가득 담긴 시선은 그 돈이 아깝지 않을만큼의 우월감을 제공했다. 

처음 그녀와 잠자리를 가지던 날을 생각하니 갑자기 몸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정거장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방송 소리에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아직 도착하려면 몇 정거장이 더 남아있었다. 기껏 준비했던 게 모두 허사로 돌아갈 판이었다. 

여자친구는 기다리는 걸 지독하게 싫어했다. 차라리 걸어가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초조한 마음에 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이제는 거의 뛰다시피

하며 약속 장소로 향하기 시작했다.

 

“악!”

 

너무 마음이 급했던 탓일까. 아니면 새로 산 구두 때문일까. 나는 그만 빙판길을 밟고 미끄러지고 말았다. 

숨이 턱 막히고 눈 앞에 별이 빙빙 도는 기분이었다. 한참 동안을 컥컥거리며 누워있다 겨우 몸을 

일으킬 때 였다. 일어나는 나에게 누군가 손을 내밀었다. 

 

“으… 감사합니다.”

 

검은 코트 차림의 남자였다. 나와 비슷한 키에 비슷한 덩치를 가진 남자였다. 인사를 하기 위해 그를 

바라본 나는 얼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자리에 서서 굳어졌다. 

 

그건 나였다. 

 

거울을 보고 있는 것 처럼 나와 똑같이 생긴 남자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약간의 잔주름과 옷차림

그리고 짧게 올려 친 그의 헤어 스타일 뿐이었다. 도대체 이 남자는 뭐란 말인가. 

나한테 쌍둥이가 있었나? 그럴 리 가 없었다. 내가 귀신이라도 보고 있는 걸까?

도플갱어? 도플갱어와 마주치면 죽는다는데… 

갑자기 등 줄기에 전기라도 감전된 것 처럼 찌릿찌릿하고 소름이 돋았다. 

그냥 닮은 사람이겠지.. 아니면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혀서 정신이 없어서 그런걸거야..

그 남자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 누구세요?”

 

무표정한 얼굴로 날 보고 있는 그 남자의 입이 열리고 난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나와 똑같은 목소리였다. 

 

 

“xxx. 맞지?”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똑같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말하는 걸 듣는건 기묘한 경험이었다. 

갑자기 공포심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난 조금씩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뭐.. 뭐야 당신? 당신 누구야? 내 이름은 어떻게 아는거야?”

 

“나? 보면 모르겠어? 나야 나. xxx. 너라구. 정확히 말하자면 서른 셋의 너지.”

 

“그게 무슨… 지금 장난치는거야? 뭐 몰카 그런거냐구!”

 

난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주변에 카메라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건 길을 오고가는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그 때 주머니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을 새도 없이 남자가 말했다. 

 

“그 전화. 안 받는 게 좋을 걸.”

 

“뭐…뭐?”

 

“약속에 늦어서 여자친구가 화가 잔뜩 났을 테니까. 괜히 지금 통화해봤자 머리만 아프지. 괜찮아. 가방만 주면 

금방 풀릴 테니까. 알잖아 걔 명품이라면 환장하는 거.”

 

나는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엔 여자친구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도무지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개를 들었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핸드폰은 아직도 계속 울리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은 이미 지난 후였다. 

뒤늦게 약속 장소로 향했다. 평소였다면 잔뜩 화난 여자친구 때문에 걱정이 됐겠지만 지금 당장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 남자의 말대로 여자친구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핏대를 세워가며 화를 내는 여자친구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계속 아까 있었던 그 기묘한 만남에 대해서 생각했다. 

넘어지면서 기절이라도 한 걸까. 그래서 잠깐 꿈이라도 꾼 걸까.

 

“…빠! 오빠!”

 

여자친구의 부름에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여자친구를 바라봤다. 잔뜩 화가 난 얼굴이었다. 

 

“으.. 응?”

 

“내 말 듣고 있었어? 뭐하는 거야 도대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삼십 분이나 늦은 주제에!”

 

“아.. 미안. 잠깐 머리가 아파서.”

 

“미안하다면 다야? 나 기다리는 거 싫어하는 거 몰라!?”

 

“알지. 진짜 미안해. 아 맞다. 이거 받어.”

 

“뭔데 이게?”

 

“너 이 가방 가지고 싶다고 전부터 노래를 불렀잖아.”

 

뾰로통한 표정으로 여자친구는 쇼핑백을 건네받았다. 상자 위에 새겨져 있는 명품 로고를 보고 나서야 

여자친구의 표정이 조금 환해졌다. 

 

“뭐야~ 누가 선물 달랬어?”

 

툴툴대며 말했지만 여자친구의 눈은 웃고 있었다. 선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날 밤 여자친구는 

어느 때 보다 격렬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관계를 가지는 와중에도 그 남자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며칠 뒤 나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며칠 동안 수업에 나가지도 여자친구를 만나지도 않았다. 

꿀꿀한 기분에 밖으로 나가 돈이나 펑펑 쓰면서 놀아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마저도 내키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누워서 며칠 전 있었던 그 이상한 사건에 대해서 떠올리고 있었다.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혀서 헛것을 본거라고 스스로 결론내렸지만 찝찝한 마음은 가시질 않았다.

띠.띠.띠. 누군가 도어락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소리가 들렸다. 비밀번호를 알려준 건 여자친구 뿐이었다.

 

“자기야?”

 

문 쪽에선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 오는게 보였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그때 그 남자였다. 남자는 제집에라도 들어오는 것 처럼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당신 뭐야! 여긴 어떻게 알았어! 비밀번호는 또 어떻게..”

 

그는 내 말따위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감탄을 내뱉었다. 

 

“캬~ 진짜 기억대로네. 오랜만이야.. 아니 처음인가?”

 

그는 그렇게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남자를 피해 부엌으로 

들어갔다. 씽크대 옆에 놓여있는 칼꽂이가 눈에 들어왔다. 난 칼을 꺼내 들고 그 남자에게 겨눴다.

 

“너 뭐야 도대체! 너 뭐냐고!” 나는 울상을 지으며 거의 악다구니 치다시피 외쳤다.

 

날 빤히 보던 그는 코 웃음치며 

 

“풋. 뭐야. 찌르기라도 하게? 아서라. 개구리 해부하는 거 보고 기절한 주제에 사람을 찌른다고?”

 

“그걸 어떻게…”

 

증학교 때 일이었다. 해부 실습을 하면서 내장을 다 드러낸 개구리가 꿈틀거리는 걸 보고 난 기절했다. 

그 일을 아는 사람은 중학교 친구들 뿐이었다.

 

“더 해줘? 팔에 난 그 상처. 남들한텐 싸우다 다친 상처라고 말하고 다니지? 사실은 그냥 담 넘다 철조망에 긁힌건데. 겁많고 소심해서 싸움 근처엔 가보지도 않았는데 괜히 기죽기 싫어서 그렇게 떠벌리고 다니는 거잖아. 군대가기 전 날 가기 싫다고 화장실에서 질질 짰지? 어디 보자 또 뭐가 있지.. 

아 맞다.”

 

“그만! 그만해!”

 

멍하니 듣고있던 나는 소리를 질렀다. 내 얼굴, 내 목소리로 내가 감추고 싶었던 치부를 공개당하는 건 

정말이지 묘한 일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걸 다…”

 

“말했잖아. 난 너라니까? 서른 셋의 너라구. 그러니까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나는 칼을 떨어뜨리고 그대로 주저 앉았다. 꿈도 헛것을 본것도 아니었다. 

이 황당한 상황이 내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었다. 

그는. 그? 그라고 불러야 하나? 아무튼 자기가 나라고 주장하던 그 남자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날 보더니 말했다. 

 

“그래그래.. 이해해. 이게 뭔가 싶지? 이게 꿈인가 싶고? 나도 그랬으니까. 근데 이건 꿈이 아니야. 

현실이라구. 당장은 혼란스러울거야. 그러니까 천천히 얘기를 해 보자고. 맨정신으로 좀 그러면 

술이라도 한 잔 하면서 얘기할까?”

 

그는 찬장으로 가더니 찬장 구석에서 와인을 꺼내들었다. 와인병을 손에 들고 한참동안 보던 그는 

피식 웃었다. 

 

“이 와인말이야. 여자친구랑 마시려고 비싼 돈 주고 산건데 찬장에 넣어 놓고는 그대로 까먹어버렸어. 

이 놈의 건망증 참. 나중에 대판 싸우고 나서 홧김에 깨 부셔버렸지. 웃긴게 뭔 줄 알아? 내가 지금껏 

살면서 산 술 중에 이 와인이 제일 비싼거였어. 그걸 이제서야 마시게 되는군. 그것도 또 다른 나랑 같이.”

 

맥이 탁하고 풀리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얼마전에 와인을 사서 넣어 놓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는 오프너로 와인을 따고는 그대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는 와인병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와인병을 받아들고는 와인을 한모금 마셨다. 떨떠름한 맛이 찌르르하고 목젖을 울렸다.

술이 들어가니 조금 진정이 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식탁 의자에 걸터앉아서 그를 바라봤다. 

정신을 차리고 나는 내 신변잡기에 대한 질문을 그에게 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일부터 시시콜콜한 

일까지. 그는 하나도 막힘없이 대답했다. 표정, 습관, 작은 버릇하나까지도 기계로 찍어낸 것처럼 나와 똑같았다.

결국 나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나였다. 나는 천장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때. 이제 좀 믿음이 가?”

 

“…관리 잘했네.”

 

그가 미래의 나라는 걸 인정하고 나서 내 입에서 튀어나온 첫 마디는 얼빠진 말이었다. 

그는 크게 웃었다. 

 

“푸하하하! 그치? 내가 은근 동안이야. 이래뵈도 어디가면 이십대 소리도 많이 듣는다고.”

 

실제로도 나와 그의 차이는 많아보이지 않았다. 약간의 잔주름이 생긴것 만 제외하면 

지금 내 모습과 별반 다를게 없었다. 긴장이 풀린 나는 질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타임머신이라도 발명한거야?”

 

“타임머신? 흠.. 타임머신이라고 하기는 약간 애매하고. 그냥 통로를 발견했달까?”

 

“통로?”

 

“그래 통로.”

 

그는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잘들어. 나는 너지만 한편으로는 너와는 별개의 인물이기도 해.”

 

“그게 무슨 뜻이야?”

 

“말했잖아. 나는 서른 셋의 너라고. 너는 스물 다섯의 나인거고.”

 

“그게 그거 아니야? 시간이 지나면 내가 너가 되는거잖아.”

 

“그게…… 이건 좀 말하기 그런데. “

 

그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한참동안 말없이 앉아 있던 그는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을 보더니 나에게 물었다. 

 

“올해가 몇 년이지?”

 

“2012년이지.” 

 

“이제 12월이니까. 요번 달이 지나면 몇 년이 되지?”

 

“2013년이 되지. 도대체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너한테 2013년은 없어.”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너한테 2013년은 없다고. 올해가 지나면 넌 다시 2012년을 살게 돼.”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다시 살게 된다고..?”

 

“그래. 올해가 지나면 넌 다시 스물 다섯의 인생을 보내는 거지. 무한하게.”

 

“잠깐.. 말이 안되잖아. 난 다 기억한다고!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태어나서 자란 걸 다!”

 

“그건 다 심어진 거야. 넌 스물 다섯 까지의 기억을. 난 서른 셋 까지의 기억을. 해가 지나면 싹 지워지고 

다시 시작하게 되는거지. 간단하게 말하면 아파트 같다고나 할까? 해가 지난다고 윗층으로 옮기진 

않잖아. 원래 살던 자리에서 계속 사는거지.”

 

“말도 안돼! 그럼 내 인생이 다 정해져 있다는 거야? 누가 그런 짓을!”

 

“아마도. 그분이겠지.”

 

그는 조용히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나는 절망에 빠졌다. 남들이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면 미친 소리라고 비웃었겠지만 그 얘기를 전해준 건 

나 자신이었다. 

 

“…그럼 만약 내가 지금 저 창문 밖으로 뛰어내린다면 넌 어떻게 되는 거지?”

 

“글쎄.. 아마도 사라지지 않을까? 그래봤자 넌 실천에 옮기지도 못할 테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

 

맞는 말이었다. 난 단순한 궁금증에 창 밖으로 몸을 던질 정도로 무모하지도, 용감하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니?”

 

“어차피 난 죽어.”

 

“죽는다고?”

 

“그래 난 서른 셋에 죽는다고.”

 

서른 셋에 죽는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굳이 장수하고 싶다는 마음까지는 아니었지만 

서른 셋은 너무 이른 나이였다. 

 

“.. 어떻게?”

 

“뭐. 교통사고지. 정확하게 말하자면 타살이지만.”

 

“타살?”

 

미래의 나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현재의 나는 누군가에게 살해당할 만큼 원한을 사는 일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물으려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제일 

먼저 물었어야 할 의문이었다. 

 

“넌 도대체 이걸 다 어떻게 아는 거야?”

 

그는 대답 대신 나에게 되물었다. 

 

“너. 날 처음 봤을 때 무슨 생각을 했어?”

 

그를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려봤다. 

 

“글쎄.. 처음엔 헛것을 본 줄 알았지. 혹시 잃어버린 쌍둥이는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었고.. 귀신.. 

괴물.. 도플갱어?”

 

딱. 그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그래 그거야. 도플갱어. 도플갱어란건 말야. 신화나 괴담 따위가 아니야. 단지 프로그램 상의 오류일 뿐이지.”

 

“프로그램?”

 

“그래 운명이란건 말야. 잘 짜여진 프로그램 같은거야. 답이 딱 한 가지로만 정해진게 아니라구. 

여러가지 변수가 있고 그 변수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낼 수도 있는 거야. 다만 이 프로그램이란 것도 

완벽한게 아니란 말이지. 가끔은 오류가 생기기도 해. 그 분도 완벽하진 않은 가봐. 아니면 이 세상을 만들 때 

외주를 줬던지.”

 

“그 오류란게..”

 

“그래. 도플갱어지. 또 다른 너. 완벽하게 같은 너. 프로그램에서 유일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변수.

니가 누구를 만나건 이 프로그램은 완벽하게 대응할 수 있어. 자기 자신만 빼면. 자기 자신을 만났을 때의 

대처 방법은 프로그래밍 되어 있지 않으니까. 프로그램이 꼬여버리는 거라고. 나중에서야 그걸 알고 뒤늦게 조치를 취했지.”

 

“도플갱어를 만나면 서로를 죽이게 만든다…”

 

나는 예전에 본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중얼거렸다. 

 

“그래. 서로를 죽이게 만드는 거지. 둘 다 죽어버리면 더이 상의 문제는 없어지는 거니까.”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된거지? 놀라긴 했지만 널 죽이고 싶을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우리는 도플갱어가 아니야. 네가 스물 다섯의 널 만난다면 그게 네 도플갱어겠지.”

 

“그럼 넌..?”

 

“그래. 난 내 도플 갱어를 만났어.”

 

“.. 죽인 거야?”

 

“그랬을까?”

 

내가 누군가를 죽인다는 게 상상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맞아. 우리는 누굴 죽일 위인이 못돼. 처음 도플갱어를 만났을 때 정말 얼마나 놀랐던지. 내 얼굴, 내 목소리, 

내 기억까지 전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나를 만난 거니까. 정말 죽이고 싶었는데 몸이 말을 안듣더라고. 

그 놈도 마찬가지더군. 우리를 만들 때 너무 겁쟁이로 만들었나봐. 그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 줄 알아? 

어렸을 때 읽었던 전래 동화가 떠올랐어. 왜 있잖아. 쥐가 게으름뱅이 손톱을 먹고 사람이 됐다는 얘기. 

난 그 쥐새끼를 죽이는 대신 한 발 물러서는 걸 택했지. 내 차키를 쥐어줬어. 어차피 내가 아는 걸 다 아니까. 

그렇게 물러서는 척 하면서 나중에 그 놈이 돌아오면 주차장에서 그 놈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했지. 

귀찮은 출장도 대신 시킬 겸. 난 게으름뱅이니까.”

 

그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신 후에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 놈이 죽어 버린거야. 교통사고였지. 내가 죽자마자 와이프는 집에 딴 남자를 들이더군. 

그래 그 년이 날 죽인 거야. 명품만 밝히는 멍청한 년이 딴 놈이랑 바람이 난 거지.”

 

“…설마?”

 

“그래 맞아. 지금 네 여자친구. 내 와이프. 그 년이 날 죽인 거라고.”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거짓말. 거짓말 하지마.”

 

그는 웃으며 말했다. 

 

“거짓말이라고? 누굴 믿는 건 네 자유지만 잘 생각해봐. 돈으로 낚은 여자와 너 자신 중 누구를 믿어야 할지.”

 

“아무튼. 그렇게 1년이 지났어. 다음 해 첫 날에 내가 뭘 본 줄 알아? 내 집 앞에서 다정하게 나오는 와이프와 

나였어. 2021년은 오지 않았어. 2020년이었지. 그리고 그 모든걸 기억하는 사람은 나뿐이었어. 

나는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었으니까. 죽은 걸로 처리되었어야 할 인간이었으니까. 그것 뿐만이 아니었어.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떻게 리셋되는지. 심지어 어떻게 하면 다른 시간대로 이동할 수 있는지 까지.

마치 원래 있었던 기억처럼 머릿속에 남아있더라고. 프로그램이 꼬여 버린거지.” 

 

난 멍하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불현듯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럼.. 여기로 온 이유가..”

 

“그래. 그 망할 년. 그 년을 죽이러 온 거야.”

 

죽인다고? 내 여자친구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잠.. 잠깐. 꼭 죽일 필요까진 없잖아. 그래 내가 내일 당장 헤어지자고 할게. 그럼 되잖아.”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걸론 안돼. 말했잖아. 그건 작은 변수일 뿐이야. 결국은 다시 만나게 된다고.”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사람을 죽이는 일이야. 너도 나니까 잘 알겠지. 우리가 사람을 죽일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의 입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그는 실실 웃으며 말했다. 

 

“사람은 말이야. 시간만 충분하면 어떤 일이든 익숙해지기 마련이야. 내가 그곳에서 몇 년을 보냈다고 생각해?”

 

그건 분명 살인자의 얼굴이었다.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한. 그는 분명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를 설득해야 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생각을 짜내기 시작했다. 

 

“맞아! 아무리 지금 여자친구를 죽인다 해도 올 해가 지나면 다시 돌아온다고! 그러면 아무 소용 없는 거잖아!”

 

“제법인데?  근데 말야 내가 그런 것도 생각을 안 해 봤을 것 같아? 몇 해를 반복하면서 내가 제일 참을 수 없었던 게 뭔 줄 알아? 

그건 바로 지루함이었어. 처음엔 와이프와 그 쥐새끼를 죽여버리려고 했었지. 

집 근처에 숨어서 놈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저 놈을 죽이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답은 간단했어.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가는 거였지. 

 놈과 나는 세포 하나하나 까지 완벽하게 같은 인간이니까. 지금 놈을 죽이면 결국 원래 내 자리로 돌아가는 것 뿐이었어. 

그렇게 또 서른 셋의 인생을 다시 살게 되는 거지. 난 결국 놈을 죽이지 못했어. 그렇게 또 몇 년을 보냈지.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인간으로 몇 년을 보냈어. 해가 한 번 바뀌면 나도 다시 젊어졌지. 

늙어 죽을 수도 없고 차라리 자살을 할까 생각도 해봤는데 역시 무섭더라고. 

그러다 한 번은 길거리 노숙자와 시비가 붙었어. 자주 보던 노친네였지. 홧김에 밀어버렸는데 

덜컥 죽어버린거야. 처음엔 겁이 나더라고. 알잖아? 우리 겁 많은 거. 근데 생각해보니까 우스운거야. 어차피 올해만

지나면 다시 살아날텐데. 축 늘어져 있는 노친네를 보니까 왠지 기분이 괜찮더라고. 스트레스가 풀린달까? 

그 때부터 난 취미로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어. 주로 여자나 노인들이었지. 몇 년이나 반복 됐을까. 언제부턴가 

그 노친네가 안보이는 거야. 내가 처음 죽였던 노친네가. 원래 남자들이 첫 경험을 못 잊잖아 . 근데 아무리 찾아도 

없어. 안 보여. 그래서 그 때 알았지. 아.. 이 노친네가 완전히 죽어버린 거구나. 아예 이 세계에서 사라져버린 거구나.  

그 때부터 난 연구를 하기 시작했어.칼로 찔러도 보고. 몽둥이로 때려보기도 하고. 불에 태워보기도 하고. 

근데 아무리 해도 계속 다시 살아나는 거야. 땅에 묻고, 토막을 치고, 아예 형태조차 남지 않게 찢어 발겨도 말야.”

 

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난 점점 초조해졌지. 이제는 누굴 죽이는 것 조차 지루해지기 시작하는 거야.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12월 31일 이었지. 나는 그 때 인파들 속에 있었어.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려고 말야. 그 때가 1년 중 

제일 재밌고 서글픈 날이었지. 종소리를 들으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말야.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다고. 다들 하나같이 들떠서는 상기된 얼굴로 새 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지. 

매 번 같은 인생을 챗바퀴 돌듯이 살고 있다고는 상상이나 하겠어? 그렇게 혼자 미친사람처럼 낄낄대다 

보면 또 한없이 서글퍼져.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나 뿐이니까. 적어도 저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테니까.

종소리가 들릴 때 쯤. 갑자기 생각났어. 내가 마지막으로 그 노친네를 봤던 게 언제였는지. 바로 오늘이었지.

몇 해 전 오늘. 그제서야 알게 됐어.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 시간이 문제였단 걸.

그리고 1년 동안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 다시 12월 31일이 왔을 때 나는 길거리 노숙자들 하나를 죽였어.

해가 바뀌고 나서 나는 그놈을 찾아다녔지만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어. 그 놈도 완전히 사라져 버린거지.”

 

“..12월 31일에 죽인 사람은 다시는 되살아나지 않는다고?”

 

“그런줄 알았지. 근데 그렇게 간단한게 아니더라고.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난 내가 살해당 하기 전 해로 향했어. 서른 둘의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난 집에 들어가서 와이프를 죽였지. 간단했어. 비밀번호도 알고 있었으니까. 집에 몰래 들어가서 자고 있는 와이프의 목을 졸라 죽여버렸지. 그러고 다시 돌아왔어. 그런데 그대로였어. 와이프는 여전히 살아 있었지. 몇 번을 다시 해봐도 마찬가지였어.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야 나는 드디어 알게 됐어. 그래서 널 찾아 온거야.”

 

“뭘 말이야?”

 

그는 몸을 일으켜 책상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책상 위의 달력을 한 장 한 장 넘기기 시작했다. 

 

“2020년과 2012년의 공통점이 뭘까?”

 

“그게 무슨 소리야?”

 

난 공통점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려봤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뭐야. 모르는 거야? 실망인데? 잘 생각해봐. 1년은 며칠이지?”

 

달력을 넘기던 그의 손이 멈췄다. 2월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그 공통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윤 년..”

 

“그래 맞아. 원래 1년은 365일이지. 근데 올해는 아니야. 하루가 남지. 난 곰곰이 생각해봤어. 

도대체 뭐가 틀린건지. 왜 노친네는 사라지고 와이프는 다시 돌아온 건지. 다른 건 그것 뿐이었어. 

와이프가 죽은 건 365번째 날의 저녁이었고 노친네가 죽은 건 366번째 날의 저녁이었다는 것. 

그래서 난 4년 전으로 갔지. 길에서 자고 있는 노숙자를 하나 죽이고 다시 돌아왔어. 

그랬더니 어떻게 된 줄 알아? 4년 전 신문에서 작은 기사를 하나 발견했지. 길에서 의문사한 한 노숙자에 

대한 기사였어.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은 거지.”

 

띠리리리 띠리리리.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12월 31일을 알리는 알람소리였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웃차. 그럼 대화도 충분히 나눈 거 같은데 슬슬 일어나 볼까.”

 

그가 어디로 향할지는 안봐도 뻔한 일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했다. 

 

“잠깐!”

 

“뭐야? 아직도 궁금한 게 남았어?”

 

“왜.. 왜 하필 올해지? 왜 하필 나야! 더 전으로 갈 수도 있잖아. 그러면 죽이기도 더 편할테고!”

 

“뭐야. 지금만 아니면 여자친구가 될 사람이 죽어도 상관 없다는 거야? 흐흐 역시 너는, 아니 우리는 

음흉한 데가 있어 그지? 난 아이를 죽여본 적이 없어. 아직은. 불쌍하잖아?”

 

미친자식.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인 얘기를 했던 주제에. 

 

“그.. 그럼 내가 도와줄게! 나랑 같이 가면 되잖아!”

 

“그건 좀 곤란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그런 생각은 안 하는게 좋아. 뭐 어차피 가능하지도 않겠지만.”

 

“… 어째서?”

 

“잘 생각해봐. 벌써 까먹은거야? 난 내 도플갱어를 죽이지 않았다구. 내가 여기 있을 수 있는건 저 쪽 세계에 

아직 서른 셋의 내가 남아있기 때문이야. 너는 어떨까? 원래 존재해야 할 시간과 장소에 네가 없다면 

그거야 말로 이 프로그램에서 제일 큰 오류 아니겠어?”

 

“……”

 

“내가 굳이 널 찾아온건 말야. 음.. 이건 내 가설인데 내가 설령 더 이전으로 가서 그 년을 죽인다 쳐도 아마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거야. 말 했잖아. 아무리 변수가 있다 치더라도 우리 인생에 대강의 가이드라인은 

정해져 있는거라고. 아마 다른 여자를 만나겠지. 그리고 그 여자에게 살해 당하겠지. 사실 널 찾아온 것도 

나한테는 일종의 도박이야. 지금 그 년을 죽여도 내 인생은 여전히 불행할지도 모르지.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큰 변수를 찾아 온거라고 난. 어차피 난 네 동의를 구하러 온 게 아니야. 넌 내일이면 다 잊을테니까. 

그냥 과거의 나에게 인사차 들린거라고나 할까? 넌 그냥 새로운 인생을 즐기기나 하라구.”

 

그는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처럼 주저앉은 채 얼어붙어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의 말을 곰곰이 되씹어 보던 중 불현듯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 놈을 죽여야 한다. 단순히 여자친구를 구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나온 생각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구질구질했던 내 인생 중 어쩌면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시간, 돈, 여자 무엇 하나 모자란 게 없었다. 

어차피 같은 인생을 또 다시 살게 된다면 지금 가진 것 중에서 무엇하나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택시! 택시!”

 

택시를 타고 나는 여자친구의 집으로 향했다. 여자친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제발.. 제발.. 자정이 넘었지만 아직 클럽이나 나이트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몰랐다. 

집 앞에 도착해서 나는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이 열리고 나는 여자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불은 꺼져 있었고 어디에서도 여자친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목이 터져라 여자친구의 이름을 불러봤지만 내 목소리는 텅 빈 방 안을 맴돌 뿐이었다. 

아마도 집에 없는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난 한숨을 내쉬고 몸을 돌렸다. 

 

푹.

 

아랫배에서 차가운 느낌이 들었고 이내 뱃속이 뜨끈뜨끈해 지기 시작했다. 난 그대로 쓰러졌다. 

따뜻하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바닥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피였다. 그리고 불이 켜졌다. 

내 앞에 익숙한 발이 눈에 띄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내가 보던 그 발이었다. 

 

“어…. 어… 왜…?”

 

그는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내 얼굴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렇다는건.. 난 배를 움켜쥐고 힘겹게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뭐해? 아~ 여자친구 찾는거야? 걱정하지마. 지금 놀러 나갔으니까. 이따 만나기로 했으니까 걱정 안해도 돼.”

 

“왜… 왜? 어째서?”

 

그는 칼 손잡이를 빙빙 돌리면서 말했다. 

 

“그게 말야. 사실은 거짓말이야. 뭐 전부 다는 아니구. 어쨋든 니 여자친구는 죽어. 4년전에 죽었지. 아아. 아니구나 4년 뒤가 되겠구나 내 정신 좀 봐. 그러니까 2016년 12월 31일이지. 집에 있다가 목이 졸려서 죽은 채로 발견되지.”

 

눈 앞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그는 날 보더니 내 볼을 찰싹찰싹 때리며 말했다. 

 

“야. 야. 아직 아니야. 지금부터가 재밌는 부분이라고. 그년이 죽고나서 2020년의 나는 행복해 졌을까?

아니. 전혀. 그 때부터 4년 동안 나는 폐인처럼 지내다가 2020년에 결국 도로 한가운데로 몸을 던지지. 

캬~ 죽이지 않냐? 내가 이렇게 로맨틱한 사람인 줄은 나도 몰랐네? 내가 말했지? 운명은 잘 짜여진 프로그램 같은거라고? 물론 변수도 있고 중간중간 과정은 달라도 결국 결론은 똑같더라고. 그게 내 인생의 결론이었어. 변변치 않은 인생이지. 평범하게 살다 허영심 많고 멍청한 마누라한테 어쩌다 코껴서 죽도록 일만하다 결국 마지막엔 차에 치어 비참하게 죽는 거.”

 

“허윽.. 헉.. 근데 왜.. 날..”

 

“영원히 반복되는 서른 셋의 삶을 산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 사실 지루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어. 내가 정말로 참지 못했던 게 뭔 줄 알아? 그건 나 스스로에 대한 분노였어. 정확히 말하면 스물 다섯 살의 나에 대한 분노였지. 왜 같은 얼굴, 같은 목소리, 같은 몸뚱아리를 가지고 사는데 너만 그렇게 행복한 걸까? 나는 이렇게 시궁창 같은 인생을 사는데 말야. 다행히 나한텐 기회가 있었어. 그래서 나는 결정했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가장 행복한 파트를 선택하겠다고. 내 전성기는 스물 다섯이었어. 그 때가 내 전성기였지. 어차피 심어진 기억이지만. 문제가 하나 있긴 했지. 너. 뭐.. 그 문제도 이제는 대충 해결 된 거 같고. 멋지지 않아? 마지막으로 죽이는 사람이 나 자신이라니. 여자친구는 앞으로도 내가 계속 이뻐해 줄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편하게 가라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식은 점점 희미해 지고 있었다. 

 

 

 

“오빠! 왜 이렇게 늦었어”

 

“아 미안미안. 방 좀 치우고 오느라고. 잘 놀고 있었어?

 

“몰라. 흥.”

 

“에이~ 왜그래. 자 선물. 이거 받고 화 풀어.”

 

“어? 또? 어제도 사줬잖아~”

 

“그랬나? 뭐 어때?”

 

여자친구는 배시시 웃었다. 

 

“오빠 머리 잘랐네?”

 

“그래? 그냥 기분전환도 할 겸. 어울려?”

 

“응. 분위기가 좀 어른스러워 진 것 같아!”

 

여자친구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나는. 

아니 새로운 나는 씩하고 웃었다.



출처 :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bestofbest&no=279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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