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16일 금요일

그와 그녀의 이야기

여름을 갓 지난 하늘은 푸르면서도 덥지 않은 공기를 나에게 전해 주었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내 앞에 앉은 그녀는 반팔을 입었지만 붉은 색 체크 무늬 셔츠 속 민소매 티가 눈에 띠었다. 몇 달만의 만남인가. 하기야 전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수업 전후로 만나 우리의 사랑을 확인하기도 했었으니...

 

그녀와 멀어진 것은 많은 일들의 축적에 있겠지만 결정적으로 그날의 전화 때문이었다. 나에게 잘 보여주지 않던, 아니 한번도 보여주지 않은 즐거운 모습을 다른 사람, 아니 나 아닌 다른 남자와의 통화에서 내 앞에서 보여줬다. 그것도 자랑스럽다는 듯이...

 

덕분에 그녀의 통화 상대가 남자임을 알았지만 그녀에게 화를 낼 수 없었기에 그녀가 통화를 마치기만을 조용히 기다렸다. 그리곤 그동안 쌓였던 감정이었는지 그녀에게 난 이별을 통고했다. 그녀는 나와 있을 때는 늘 심각한 표정이었고 그리 즐거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 아닌 다른 사람과의 통화를 그리 즐겁게도 하는 것을 내 앞에서 보여준다는 것은 나에게 떠나라는 묵언의 암시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잘 지냈어?"

 

"네, 선배도 잘 지냈죠?"

 

이런 이미 할 수 있는 말들을 다 해 버렸다. 이제는 기껏해야 '밥 먹었냐'는 말 이외에는 할 것이 없었고, 이마저도 그녀가 '네, 먹었어요'라고 하면 난 다음 말을 한참이나 생각해야 할 터이다. 운이 좋다면 그녀가 '선배는요?'라고 물어주겠지만 '응, 나도' 아니면 '아니, 아직은...'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서로의 사이에는 테이블 하나 뿐이었지만 꼭 요단강이라도 놓여진 듯 어색함이 잠시 흘렀다. 하지만 나에겐 그 짧은 시간조차 한 두 시간이 흐른 것만 같았다. 내가 좋아했던 그녀, 그리고 나를 사랑했던 그녀를 이렇게 무감각한 것처럼 만난다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었다.

 

"그런데..."

 

"네? 뭐가요?"

 

내가 그녀에게 이별을 통지하긴 했지만 솔직히 그녀를 내 마음 속에서 놓아주질 못했다. 한때의 격한 감정으로 인해 그럴꺼면 헤어지자고 말했지만 그녀는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고 단지 눈물을 흘리며 그러자고 했을 뿐이다.

 

같은 대학교 선후배였기에 피하고 싶은 자리에선 서로 만나지 않을 수 있지만 우연찮게라도 만날 수 밖에 없었다. 이날도 서로가 아끼던 후배의 결혼식이였기에 의도하지 않게 만나게 되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선후배들과 인사를 하고 우리는 잠시 흡연실에서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살면서 후회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특히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라'는 말 때문에라도 선택을 하기전엔 많은 고민을 하지만 일단 어떤 선택을 한 이후엔 후회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블랙커피가 맛있다고 알려준 것과 담배를 가르쳐 준 것은 후회를 한다. 나 자신을 망친 선택이야 내 몫이지만 남에게 내 취향이 전달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지금의 나는 담배를 끊으려 하고 있고, 커피는 꼭 프림을 넣어서 먹는다. 물론 양도 줄었지만...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알렸던 그 날, 그녀의 통화에 대해서 물었다. 그녀가 나에게 보여주지 않던, 밝으면서도 애교가 섞인 목소리로 했던 어떤 남자와의 통화 내용을 나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와 있으면서도 그런 모습을 보인 그녀에게 무척이나 실망을 했고, 차라리 그녀를 위해선 내가 떠가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날, 그러니까 내가 헤어지자고 한 그 날, 누구랑 전화했어?"

 

그 날 우리는 며칠 전 마트에서 장을 보다 생긴 의견 충돌과 전날 심야 극장에서 있었던 다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일면 소심하게 보일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난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대체로 사지 않는다. 나중에 언젠가 필요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때 사면 되는 문제 아닌가. 하지만 그녀는 미리 대비하자는 측면에서 일단 특별 할인이라도 하면 무조건 사자는 주의이다. 누군가 말했던가, 남자는 필요한 1달러 물건을 2달러에 사고, 여자는 필요하지 않은 2달러 물건을 1달러에 산다고... 그녀는 쇼핑에 있어선 남자와 비슷하다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엔 그녀도 결국 여자였다.

 

"선배, 몰랐어요?"

 

한참만에 그녀가 입을 열었지만 난 누구의 통화를 엿듣는 것은 결례라 생각하여 일부러 듣지 않으려 했고, 그날도 그녀가 나에게도 들릴 수 있게 폰을 살짝 틀었지만 다른 생각이나 게임을 하며 정신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켰다.

 

"오빠하고 통화했어요."

 

그녀의 오빠는 나보다 나이는 한 살 위지만 재수를 해서 학번은 나랑 같았다. 게다가 생일이 빨라 한 학년 일찍 들어갔기에 실제 나이는 나랑 같은 셈이었다.

 

"그랬구나."

 

그나마 그녀가 그렇게 애교를 떨며 전화 통화를 한 것이 어느 정도 이해는 됐다. 그녀는 1남 2녀의 막내였고, 오빠는 장남이었기에 아마 그랬을 수도 있다. 나야 남자 형제뿐인 집이고, 우리 집안 전체가 여자가 귀한 편이라 다들 여자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는 편이었다. 삼촌들 모두 이혼을 한 후에야 새로운 여자와 결혼을 했고, 우리 집과 큰 집만이 이혼 한 사람이 없을 뿐이었다.

 

"그날 오빠랑 무슨 얘기를 했는 줄 알아요?"

 

"글쎄..."

 

그녀가 오빠랑 통화를 했다면 아마 더더욱 듣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전화를 받는 그녀를 위한답시고 자리를 잠시 피했고, 너무나 즐겁게 통화를 하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스스로 자괴감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날, 오빠랑 당신 얘기했어요. 내 인생의 짝을 만난 것 같다고요."

 

"......."

 

난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있을 수 밖에... 눈꺼풀이 내려와 눈을 덮고 있었지만 흘러내리는 눈물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이 내 오해였다.

 

그녀의 옆에 앉아 바닥에 닿지도 는 다리를 흔들거리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하얀 스타킹을 신은 그녀의 딸은 이쁜 원피스 치마와 해바라기 모양의 머리핀을 꼽고 있었다. 쌍꺼풀이 없는 그녀와는 달리 깊이 패인 아이의 눈망울이 나를 더욱 슬프게 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LFP 배터리 차들을 어이 할꼬?

   중국에서 판매하거나 수출하는 대부분의 전기차는 배터리로 LFP(리튬, 인산, 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국산이라고 LFP를 사용하는 전기차가 없지는 않습니다. 기아 레이 전기차가 그렇고,  KG 모빌리티에서 판매하는 전기차들이 LFP를 배터...